아내와 가끔 술을 마십니다. 예전에는 농민답게(?) 막걸리를 주로 마셨는데 여름철에는 마시고 남은 것을 아무데나 주는 바람에 식초가 되고 말아 헤펐습니다. 까짓 거 나방 잡는 유인제로 쓰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면, 아내는 당장 그 비싼 재료 써서는 본전도 안 빠진다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아내가 말하는 본전이 뭐냐고 물으면 보나마나 불벼락일게 빤해 여태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맥주로 바꾸자고 하자 아내는 선뜻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따져보아도 아내의 망설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싼데다가 막걸리보다 많이 마셔야 취기가 오르는 단점이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부부 둘 다 술이 약한데 소주를 마실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했더니 단서를 하나 달아 동의했습니다. “도수가 낮다고, 그리고 맛이 좋다고 벌컥벌컥 아무 때나 마시면 안 돼.”그럴 리야 없습니다만, 톡 쏘는 맥주 맛이 떠올라 군침이 돌기는 했습니다.


 술이 아닌 술자리 얘기하려다가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하루 내내 일하느라 뻣뻣해진 몸을 풀자고 조촐하게 술상을 앞에 놓고 앉으면 아내는 잔을 들고 멀찌감치 꽁무니를 빼서 벽에 기대앉습니다. 습관처럼 그러는군요. “이봐. 부부지간에도 주도가 있는 법인데 말이야. 상머리로 와 앉아 마셔야지, 안 그래?” 제가 이러면 허리가 결리다거나 무릎이 시리다는 둥 구시렁거리면서도 술상 앞으로 와 건배도 하고 안주도 한 점 먹곤 하는데요. 그러다가는 곧 벽이 무슨 자석인양 어느새 딱 달라붙어 버립니다. 그러려니 하면 되는데 불콰해지면 아내가 코앞에 있어야 술술 말이 잘 나오는 터라 기분이 상합니다. 재우쳐 술상으로 오라고 채근하면 나와 앉는 시늉을 하다가 금세 잔도 안 들고 벽에 기대버립니다.

어쩌겠습니까? 취기가 오른 저는 벽에 비스듬히 기댄 아내를 마주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마구 늘어놓는 것이죠. 그러기를 5분도 지나기 전에 아내는 그 자세 그대로 잠이 듭니다. 거의 매번 그렇습니다. 술기운에 몸이 살살 녹는다는 걸 몸소 실천하는 아내입니다.


 문득 김샌 맥주 꼴이 된 저는 입맛을 쩝 다시면서 남은 잔을 마십니다. 아내를 바로 뉘고, 베개도 받쳐준 다음 이불을 가슴까지 덮어주면 잠결에도 발로 걷어찹니다. 아내 잔에 남은 술을 뜸 들여 마신 다음 이불을 살포시 덮어주면 깊이 잠든 아내는 얌전합니다. 매번 술자리에 나만 홀로 남겨두는 게 괘씸해서 꿀밤이라도 주고 싶습니다. 심심함을 달래며 잠든 이튿날 새벽이면,“내 잔에 있던 술 어쨌어?!”저보다 먼저 깬 아내는 이런 말로 저를 깨웁니다. 도무지 미안함을 모르는 아내입니다. 


 고추 줄을 한 칸 더 띄우다가 이런 아내와의 술추렴이 떠올랐습니다. 줄띄우기는 아내와 둘이 해야 시간도 힘도 덜 드는데 다른 데도 워낙 할 일이 많아 혼자하자니 고역입니다. 줄 한 칸에 늘어졌던 고추줄기가 일어서는 걸 보며 한마디 했습니다.“너는 좋겠다. 기댈 구석이 있어서. ”아내를 닮아가는 지 요즘 농작물에 대고 말하는 때가 잦습니다. “와, 고추 이렇게 좋은 건 올해가 처음이야.” 고추에 유난히 애정이 깊은 아내가 흥분해서 외쳤을 때 제가 그랬습니다.

“뭔 소리야. 그 가뭄에 등짐 지어 나르듯 뻔질나게 물 준 게 누군데, 안 그래?” 제가 개울물 다 말라가는 와중에도 그랬거든요. 말은 그랬어도 혹독한 가뭄을 이기고 훨훨 살아나는 게 저도 신기합니다. 그저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대로 가을까지 이어지기만을 비는 욕심이 듭니다.


 “고추 작황 좋은 기념으로 한잔 할까?” 아내가 그러자고 합니다. “대신, 제발 벽에 기대지 좀 말고, 알았지?” “댁은 한번이라도 등 기댈 든든한 벽이 되어준 적 있어?” 이건 유명한 시, ‘너에게 묻는다’ 의 표절 같습니다. 근데도 가슴이 뜨끔한 건 어쩔 수 없군요.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벽(사람)이었느냐!!’ 는 안도현 시인의 육성이 울려 퍼지는 것 같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했습니다. “오늘 술상은 아예 벽에 바싹 붙여줄게, 기대기 좋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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